역사속의 ‘한국형 옴브즈만’ …①
일운(一雲) 송병승
- 수필가,컬럼니스트,교육가(前고교 교장): 국민훈장석류장 - 충효예실천운동본부 공동총재
‘소방옴브즈신문’과 ‘소방옴브즈뉴스’창간을 축하한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부각됐던 ‘한국형 옴브즈만’의 사례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를 고심하면서 그 첫 번째로 어사 박문수 이야기를 주제로 삼아봤다. 우리의 역사 이야기가 소방 일선현장에서 옴브즈만 활동을 하고 있는 소방인과 독자제현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조선시대 역사는 암행어사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을 쌓은 어사(御使)로 박문수(朴文秀 1691 숙종 17~1756 영조 32)를 꼽는다. 암행어사는 임금의 특명을 받아 지방관의 치적과 비위를 탐문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살펴서 개선하는 일을 맡았던 임시벼슬이었다. 권선징악(勸善懲惡)과 힘없는 서민들의 애환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한국형 옴브즈만’의 대표적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어사 박문수의 행적부터 살핀다. 본관은 고령이고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이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의 증손이요 조선 중기 명신 이항복(李恒福)의 증손인 이세필(李世弼)의 외손자이다. 1723년(경종3)에 증광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경상도관찰사, 도승지, 병조판서, 어영대장, 호조판서, 우참찬 등의 주요 보직을 거쳤다. 1724년 소론에 속하여 노론에게 배척당해 벼슬이 삭직 당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등용되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1728 영조 4)가 소현세자(昭顯世子 인조의 맏아들)의 증손자인 밀풍군(密豊君?~1729 영조 5 이름은 坦)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음모하였다. 소론에 속한 이인좌는 김영해(金寧海), 정희량(鄭希良)과 함께 청주(淸州)를 습격하고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 이순신 장군의 손자)을 죽였다. 그리고 대원수에 오르고 충격을 받은 경종은 억울하게 죽었다. 이인좌는 결국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의 관군에 의해 반란이 진압되었다. 여기에는 박문수의 공이 지대하였고 영조는 이인좌를 처형하였다. 밀풍군도 함께 역모했다 하여 사사되었다. 이후 그는 암행어사의 직분을 완수했다. 1729년(영조 5)에 관북지방에 수재가 날 것을 예상하고 영남절도사로 있을 때 조(粟)3천석을 발송하여 재민을 구하였고 오로지 왕에게 충성, 백성을 섬겨 영성군(靈城君: 공이 있는 신하에게 내리는 존호)에 봉군되었다. 그리고 함흥 만세교 옆에 북민비(北民碑)라는 송덕비가 세워졌다.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박문수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 한 기생을 사랑했었다. 나중에 암행어사가 되어 찾아왔더니 그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문전박대했다. 함께 있던 물 긷던 여자 종이 있었는데 박색이었지만 박문수를 따뜻하게 모셨다. 박문수는 그 여종을 행수기생으로, 그 기생은 물 긷는 기생으로 정했다는 이야기이다. 암행어사는 신분을 속이고 거지 못지않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기에 박문수의 벼슬을 모르는 게 당연했다. 특기할 사항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게 한 서슬이 시퍼런 영조에게 허리를 반만 구부리고 당파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백성의 소리를 들으며 성군이 되기를 바란다고 소신 있는 발언을 했다는 점이다. 소론, 노론을 함께 비판하면서 충절을 지켜 왕을 보필하는 맹세를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부 신하는 무례하다고 벌을 내리라고 읍소했는데 영조는 박문수의 굳은 기개에 감복, 오히려 그를 1등 공신으로 옆에 두었다. 암행어사 박문수는 효자효녀를 발굴하고 탐관오리를 숙청하며 조선왕조를 지켰다. 오늘날로 보자면 기개있는 옴브즈만으로서의 역할과 책무를 손색없이 수행했다. 박문수전(傳)에 전라도 갑부 천동수가 유안거의 아내와 며느리를 빼앗으려는 것을 단칼에 천동수를 징벌하여 권선징악으로 베푼 선정은 우리에게 특히 힘없이 살아가는 서민(庶民)들에게는 오래도록 전래되어온 설화이다. 그의 초상은 보물 제1189호로 현재 천안 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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